그렇게 서슴없이 굴어본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사실 아도니스에게 많은 누나가 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도니스는 이따금 제 친누나들의 이야기를 하며 곤란한 표정을 짓곤 했으므로. 누나들이 이리저리 만져대는 게 불편했다고 눈썹을 찡그리던 아도니스는 딱 막내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아라시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랑 받고 자란 티가나는 아도니스가 귀여웠다. 받은 만큼 준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아도니스는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더 많이 사랑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떨까. 아라시는 빙긋 웃으며 아도니스에게 작은 스푼을 내밀었다. 이런 거 분명 안 좋아하겠지?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나루카미, 나는...이제 배가 불러서.”

몇 숟갈 퍼먹지도 않고 잘도 거짓말을 치네 아도니스쨩. 아니나 다를까 당황하며 고개를 뒤로 빼는 모습이 귀여워서 일부러 져주지 않았다. 그냥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포위당한 것처럼 슬그머니 들어 올린 손을 본체만체 한 아라시가 다시 한 번 아도니스의 입 주변을 스푼으로 쿡쿡 찌른다.

누나가 주는 건 살 안쪄.”

“......”

그리고 오늘은 나랑 같이 놀러왔으니까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야 해.”

놀러왔다기 보단 와준 것에 가깝지만, 어쨌든.

아도니스는 몇 번이나 더 나는 약하지 않아서 이정돈 혼자 먹을 수 있다’ ‘숟가락이 너무 작아서 부러질 것 같다같은 말로 아라시를 설득하려 했지만 당연히 먹히지 않았다. 스푼 뒤에 올라간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려 테이블위로 떨어진다. 아라시는 그것을 티슈로 닦으며 투덜대다가 결국 제 입안에 스푼을 넣었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디저트류는 처음이라고 주춤대는 아도니스를 끌고 나온 것도 아라시였고, 이렇게 챙김 받는 걸 썩 유쾌하게 여기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었으며, 이런 장난을 자연스럽게 주고 받을 만큼 친하지도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아라시는 스푼을 입에 물고 턱을 괸 채 열심히 파르페를 퍼먹는 아도니스를 바라보았다.

곤란했으면 미안해. 그러니까 그 딱딱한 표정 좀 풀어주지 않을래?”

아니 나루카미 나는, 별로 곤란하지 않았다.”

거짓말이야. 얼굴에 난감하다고 쓰여 있는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누나 눈은 못 속여. 파르페에 꽂혀서 나온 막대 과자를 잘라 아이스크림에 푹 찍은 아라시가 말했다. 찬 것을 먹으니 머리가 찌르르 울렸다.

정말이다. 그런 건 익숙해서....근데.”

아이 참. 알았어, 알았어.”

한 차례 아이스크림을 더 퍼먹고 나서야 왜 저가 그런 모험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 바보같은 짓을 하나봐. 어쩐지 우울해져서 얼른 몸 안에 단 것들을 욱여넣고 싶었다. 아라시는 아도니스에게 장난이야, 하고 말한 뒤 제 스푼으로 아도니스의 파르페잔 테두리를 톡 두드렸다.

정말 다네, 그치?”

“.... 맛있다.”

아라시가 고개를 갸웃 기울여 눈을 맞추며 묻자 아도니스는 어설픈 모양으로 베시시 웃었다. 순진무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그런 눈코입이었다. 동그랗게 올라간 뺨은 또 어떻고? 저 애는 자기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알까. 저도 모르게 아도니스를 따라 웃은 아라시가 남은 막대과자를 한 입에 넣는다. 오독오독, 씹는 소리에 집중하며 잠시 뒤집어놓았던 휴대폰을 확인하느라 고개를 아래로 숙였을 때 코끝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

고개를 확 쳐든 아라시의 눈앞에 보인 건 맹하게 스푼을 내밀고 있는 아도니스였다. 하도 엉뚱한 짓이라 의도를 곧장 파악하지 못하고 수 초간 눈만 깜빡였다. ? ? 으응? 얼뜨기들이 낼 법한 소리를 두어번 서로 주거니 받거니 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거야?”

“...나루카미는 따지고 보면 나보다 동생이니까. 내가 챙겨주는 쪽이 더.”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오늘 본 것 중 가장 진지했다. 아라시는 그런게 아니라 나는, 모두의 누나고 언니라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받아 먹어야하나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팡질팡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벌렸다. 평소라면 짚고 넘어 갈 부분이긴 했어도, 그냥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것도 단가?”

응 아도니스쨩이 시킨 게 더 다네...”

그간 아라시가 먹어 본 파르페 중 손에 꼽게 달았는데, 그게 정말 파르페의 맛이었는지. 아무튼 사랑스러운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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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를 빌려와 봤다. 여름 방학 새에 생긴 토모야의 새로운 버릇이었다. 비디오방에 들러서 추천작을 확인하고 인터넷에서 뽑아온 볼만한 영화 목록을 확인하고 그중에서 가장 좋아보이는 것으로 서너개쯤 빌려오는 일. 그렇게 비디오를 빌려서 가는 곳은 딱 정해져있었다. 토모야의 집은 아니었다. 그의 집에는 비디오를 재생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없다. 불을 끈 방안에서 컴퓨터 모니터에 꽉 찬 영상과 작은 자막을 힘겹게 읽고 보는 것이 토모야가 즐기는 취미 생활의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은 어땠는가. 무진장 큰 스크린이 있고 빌려온 비디오는 그곳을 통해 아름답고 재밌고 강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 주인을 닮아 화려하기 짝이 없다.

“저 왔어요 부장.”

딱히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된다. 열 번까진 그래도 초인종을 누르긴 했는데 이제는 그냥 이름을 말하고 문고리를 잡아 당기는 것이 끝이다. 어차피 문은 잠겨있지 않다. 활짝 문을 열자 새하얀 벽지가 발린 거실이 가장 먼저 눈에 보인다. 소파인지 쿠션인지모를 검은 덩어리와 어질러져있는 얇은 이불. 그것을 제외하면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하기 그지없다. 토모야는 슬리퍼와 운동화 두켤레가 전부인 신발장에 제 신발을 고스란히 벗어 두고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를 내본다.

“나 왔대도요.”

“오, 토모야군. 오늘은 일찍오셨네요?”

집의 주인은 부엌에서 무언갈 만들고 있던 모양인지 앞치마를 한 채로 토모야를 반겼다.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입니다. 이제는 거의 인사나 다름 업는 자기소개에도 네에. 저는 저의 마시로 토모야입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걸 보고 숙련도가 쌓였다고 하지. 와타루는 토모야의 고요를 견딜 수 없다는 듯 그의 팔목을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난잡할 줄 알았던 부엌은 의외로 몇가지 조리기구가 밖에 나와있는 것을 제외하면 깔끔했다. 만든 요리는 아마도... 샌드위치. 예쁘게 이쑤시개가 꽂혀있는 샌드위치를 보자 토모야의 눈이 크게 뜨인다.

“당신이 만들었어요?”
 “그럼요, 요리는 특기랍니다. 당신같이 평범한 사람은 비디오 하나를 빌려오는데도 두 시간씩이나 걸리지만요? 저는 이렇게 춤을 추며 집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는 것도 가능하거든요...♪”

토모야는 무어라 더 대꾸를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대신 손에 든 까만 봉투를 흔들었다. 오늘 빌려온 영화는 이터널 선샤인이에요.

“평범한 멜로물이네요.”
 “엄청 유명하다는데 부장은 봤나요?”

“음...봤습니다.”

와타루는 잠시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들고 서있다가 이내 빙긋 웃으며 말한다.

“재밌었어요.”

영화부도 아닌 것이 어째서 주말이면 토모야가 이렇게 꼬박꼬박 와타루의 집을 찾게 되었냐 함은. 가장 큰 첫 번째 원인은 바로 토모야의 오지랖에 있었다. 이상하고 맛이간 것 같지만 그래도 분명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런 사람이 가끔가다 외로움에 사무치고 있는, 무려 현재진행중인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때. 그걸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원인은 와타루의 애매한 태도에 있었다. 와타루는 주말마다 영화를 봐요, 도 아니고 이번주 주말에도 올건가요? 도 아니지만. 토모야가 찾아올 때마다 마치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음식을 준비해놓고 두 개의 방석 이불을 깔아놓는 식이었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임에도 별로, 고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물론 토모야가 질려서 찾아오지 않게 되면 이인분의 음식을 홀로 먹어야 하는 슬픔은 있겠지만.....

이제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과거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은 마지막 대화를 앞두고 있다. 그들의 추억이 사라지는 것을 두눈 뜨고 봐야만 하는 것이다. 여자주인공이 말한다. 이런 추억이 이제 다 사라지게 돼. 어떻게 하지? 와타루는 자그만 토모야의 몸을 쿠션처럼 끌어안고 홀로 대사를 곱씹어본다. 사라지는 추억에 대하여. 히비키 와타루가 책장을 넘기듯 그렇게 보내왔던 지난 날들을 곱씹어본다. 남자주인공은 대답했다. 그냥 음미하자. 그 순간 어째서 토모야와 눈이 맞았는지.

와타루는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고개를 숙인다. 허리를 굽힐수록 쌕쌕 작은 숨소리가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는 그즈음에서 멈추고 팡, 미소를 터트린다.

“영화가 지루했나요 토모야군? 지금 거의 잠드실 뻔 한거 맞지요? 이런 명작을 보면서도 느끼는 게 없다니. 토모야군 다우면서도, 뭐. 다음에는 제가 더 흥미진진한걸 찾아보도록 하죠..♪”

잠깐 뿔이 난 듯 뾰로통 뺨을 부풀리고 있던 토모야가 말했다. 

“다음이라고 했어요. 분명.”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내린다. 영화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있었다. 와타루는 이 다음 대사가 뭐였더라. 고민하다가 그냥 기억을 잃은 남자가 되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그의 가슴 한켠에도 재미있는 무언가가 피어난듯 했다. 열 아홉 살 만에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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渉 아주 어릴 때 저것과 비슷한 글자를 찾기 위해 읽을 줄도 모르는 옥편을 뒤져본 적이 있다. 어린 토모야에겐 등 언저리에 박혀있는 남의 이름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고작 이름인데 무겁고 내 키가 작은 건 다 그 탓이라 원망하게끔 만들고. 실제로도 토모야의 등은 또래의 아이들보단 조금 굽었다. 이름은 주인을 만나면 서서히 희미해지다가 사라진다던데. 얼른 만났으면 좋겠다. 이런거 있으면 옷 갈아입을때도 불편해. 자꾸 뭐냐고 물어보니까. ...얼른 사라졌음 좋겠다. 열일곱의 마시로 토모야는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교문을 넘었다. 만일 운이 좋다면 이곳에서 이름의 주인을 만나 서로에게 지우개질을 해줄 수도 있겠지만. 토모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특별한 일은 나한텐 절대 안 일어나. 절대로. 여신님이나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이게.

友也 그것은 어느날 아침 와타루의 왼쪽 어깨에 새처럼 날아와 앉았다. 히비키 와타루는 무척 똑똑했기에 옥편을 찾아보지 않고도 그것을 어떻게 읽는지 알 수 있었다. 친구. 어깨에 발을 붙이고 앉은 친구. 와타루의 세계에 그다지도 선명한 것은 그 이름이 처음이었다. 타인에게 외면당해 외로움이 저 끝에서부터 심연을 파헤치고 기어 올라올 때에도 와타루는 체조를 하듯 어깨를 좌우로 빙빙 돌리며 웃었다. 마음은 잘 알겠지만 제 어깨에 친구가 앉아있답니다. 그러니 저는 무너질 수 없게 되어있어요. 간단한 물리법칙에 의하면... ... ... 툭. 와타루는 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갈색머리에, 갈색눈에, 펑퍼짐한 교복이라니. 신장이 자랄 걸 예상하고 맞췄다면 분명 한 달 안에 두 마디는 짧아지겠네요. 그보다 조금 전에 봤는데도 얼굴이 잘 생각이 안 나는군요? 이렇게 존재감이 없을 수가. 아하하.


히비키 와타루는 이름을 자주 들여다봤다. 손목의 시계처럼, 지루한 수업시간마다 괜히 창 밖을 내다보는 학생처럼. 이름의 주인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아니 제발로 찾아왔지. 마시로 토모야를 처음 만난 날 와타루의 기분은 하늘로 날아갔고 실제로도 열기구를 타고 붕 날아올랐다.

토모야는 깐깐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뭐든지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부터 먹어버리는 아이였다. 와타루는 제 머릿속 환상과는 너무나 다른 토모야의 모습에 하루에도 백 번씩 실망했지만 이름을 타올로 빡빡 지운다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토모야를 괴롭혔다. 내 유일한 친구가, 이런 볼품 없는 남자 였다니요. 이 히비키 와타루, 통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든 말든. 토모야는 연극부 안에서의 제 입지를 착착 잡아갔다. 아마도 이름의 주인이었을 사람을 만난 것도 같았는데... ... ... 거기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은 자주 만났고 부딪히고 무의미한 언쟁을 나누고, 서로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몸 어딘가에 찍혀있을 그것. 와타루의 것은 조금 희미했고 토모야의 것은 아직 선명했다. 까무잡잡하게 탄 토모야의 등줄기를 손끝으로 슥 문지르던 와타루가 말했다.

“이거. 서로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 옅어지는 거 알고있지요?”

“누굴 바보로 알아요?”

“무엇이던 감정을 나누라는 거잖아요. 참 가혹한 형벌이지요. 토모야군에게 있는 히비키 와타루를 지우기 위해선, 나를 죽도록 미워하거나 죽도록 사랑해야 해요. 물론 저는 토모야군을 죽도록 사랑 할 준비가 되어있지만..♪”

아니 실은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 천하의 히비키 와타루도 긴가민가한 중대 사항이었는데, 와타루가 어렸을 때 비둘기 대신 참새를 꺼내놀고 단발머리를 베베 꼬고 모자 속에 새집을 숨겨두기 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시간이 흘러 풍화되었다 뿐이지. 네 살의 히비키 와타루는 자기 전에 늘 눈을 감고 생각했다. 토모야가 행복하기를.

신의 어여쁨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히비키 와타루의 소원은 저 멀리 별을 건너 평범한 집의 한 구석에 들어가버린다. 히비키 와타루가 바란 행복이 조금 달랐더라면 토모야의 인생 방향 또한 변경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신의 귀여움을 받았고 신은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려 했다. 고작 이름만으로 사랑에빠져 허우적대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소원 쯤이야.

히비키 와타루의 행복은,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하게 밥을 먹고, 평범하게 잠을 자고, 평범하게 일어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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