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WxhTbxMSvT0
브금으로 들어도 좋고 안들어도 좋음
이국의 땅은 뜨거웠다. 자글자글 끓는 모래 위를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서부터 익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뭐야? 처음 접하는 열렬한 뙤약볕은 신비롭고 새롭다기엔 하루 스물 네 시간중 스무 시간을 밤 속에서 보내는 아라시에겐 위협에 가까웠다. 말 그대로 선 채로 구워지는 기분에 쇠사슬에 돌돌 묶여 끌려가는 몸이 여러 번 휘청댄다. 본국에서 기사 훈련만 10년을 넘게 받은 몸이 서역의 기후에 차근차근 녹아내렸다. 이러다가 왕 얼굴 한 번 못보고 죽어버리는건 아닐까,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기 위해 고개를 도리질 쳐본다. 그럴 순 없다. 맡은바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간 저 뿐만 아니라 기사단의 대부분이 모가지를 잘릴 것이다.
죽을 것 같을 때마다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 식으로 끌려오다보니 평생 도착하지 못할 것 같은 궁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슬슬 묶인 손이 아파왔다. 소박하게 바라보자면 멍이 들기 전에 좀 풀어줬음 좋겠는데... 저를 포박해 가는 병사들에게 넌지시 말해보았지만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여기서부턴 눈을 가린다.”
두 손의 자유는커녕 검은 천에 눈까지 가려졌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얼굴에 용수까지 씌여졌다. 적국에서 온 스파이가 받기엔 마땅한 처사지만, 이름도 출신도 없는 무희에겐 너무 가혹한 벌이다. 힘없는 천민에게도 요만큼의 아량을 베풀 줄 모르는 졸렬한 왕일게 빤하다, 고 아라시는 생각했다.
발이 닿는 바닥이 서늘했다. 여전히 눈과 얼굴은 전부 가려졌지만 그것만으로도 궁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십 분 전부터 아라시의 걸음을 재촉하던 병사들이 잠잠해졌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담대하기로 따지자면 본국의 기사단 누구 하나 저리가라 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한 아라시일지라도 피도 눈물도 없다는 왕을 바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오금이 저리는 듯 했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팔이며 다리를 흔들었다. 옷에 달린 악세사리가 저들끼리 부딪혀 짤랑대는 소리가 났다. 이번 임무를 위해 차려 입은 복장은 기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검도, 갑옷도, 투구도 없다. 대신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 둘러진 얇은 천이 질질 끌리고 주렁주렁 달린 끈과 장식이 가랑이 사이로 자꾸만 얽혀드는 하의와 마찬가지로 얇고 짧은데다가 싸구려 보석이 박힌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배꼽이 드러나는 옷을 입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딱히 남의 시선을 신경쓰는 편은 아니지만 자꾸 곱씹으니 껄끄러웠다. 이렇게 살랑대는 옷을 입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소원을 이루게 되다니. 사실 이것보단 본국의 귀족 아가씨들이 입는 코르셋이나 프릴달린 치마 따위가 간절하긴 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아라시는 몸을 꼼지락대며 저기, 저기요. 입을 열어본다. 귀걸이나 목걸이와 머리장식이 삐뚤어지진 않았는지 좀 확인하고 싶었다. 여전히 주변은 고요하고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를 덮고 있던 용수가 벗겨진 것은 오분이 지난 후였다. 검은 천 너머로 희미하게 번쩍이는 황금이 보이는 듯도 싶었다. 어디선가 묘한 향이 풍겨오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눈을 가린 검은 천은 내버려 둔 채로 양 팔의 포박이 먼저 풀렸다. 아라시는 무엇보다 먼저 머리를 매만졌다. 작은 은구슬을 꼼꼼히 엮어 만든 장식은 아라시의 마음에 가장 쏙드는 물건이었다. 어거지로 맡게된 임무조차 행복하게 느껴졌을만큼 예뻤다. 아라시는 아마도 병사가 서있을 위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저기, 나 예뻐요?”
당연히 예쁘고 아름답겠지만, 지금은 거울 대신이다. 병사들에게선 이렇다 할 대답이 아닌 헛기침이 돌아왔다.
“그런 건 왜 묻는거지?”
만족스레 고개를 돌리는데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가 그렇게 물어왔다. 아라시는 큰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야, 왕의 앞에 서기전에 최고로 예쁜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보나마나 뻔하지만요. 그러자 상대 쪽에서 흠, 작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린다.
“겉모습의 아름다움으로 무얼 하려고?”
“나는 내면도 아름답긴 하지만, 우선은 보기에 좋아야 속물들의 눈에 들지 않겠어요?”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해서 답했다. 그 다음 말이 돌아오기 전에, 아라시의 손이 움직였다. 뒤통수에 단단하게 묶인 끈을 풀어 내리자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라시는 몇 번이고 연습한 미소를 내보이며 제 앞에 앉아있는 이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당신이 보기에 어떤가요? 나는 아름답나요?”
남자는 웃지도 그렇다고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하루의 삼분의 이가 낮이라는 불구덩이의 땅을 단박에 휘어잡은 그 왕이었다. 매끈한 피부는 햇빛에 그을려 검었고 금빛 악세서리들은 그 몸을 위해 태어나기라도 하듯 걸려있었다. 이렇게 잘생겼다곤 말 안해줬잖아...? 형형한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절로 볼이 붉어졌다.
“아름답다.”
남자는 여전히 이렇다 할 표정도 없이 아라시에게 손을 뻗었다. 아라시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투박한 손이 부드럽게 턱을 쥐는 것에 불길한 예감이 치솟았다. 조만간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너처럼 아름다운건 처음 본다.”
저도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봐요. 차오른 말을 삼키고 고분고분 남자의 손에 이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