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를 빌려와 봤다. 여름 방학 새에 생긴 토모야의 새로운 버릇이었다. 비디오방에 들러서 추천작을 확인하고 인터넷에서 뽑아온 볼만한 영화 목록을 확인하고 그중에서 가장 좋아보이는 것으로 서너개쯤 빌려오는 일. 그렇게 비디오를 빌려서 가는 곳은 딱 정해져있었다. 토모야의 집은 아니었다. 그의 집에는 비디오를 재생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없다. 불을 끈 방안에서 컴퓨터 모니터에 꽉 찬 영상과 작은 자막을 힘겹게 읽고 보는 것이 토모야가 즐기는 취미 생활의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은 어땠는가. 무진장 큰 스크린이 있고 빌려온 비디오는 그곳을 통해 아름답고 재밌고 강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 주인을 닮아 화려하기 짝이 없다.

“저 왔어요 부장.”

딱히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된다. 열 번까진 그래도 초인종을 누르긴 했는데 이제는 그냥 이름을 말하고 문고리를 잡아 당기는 것이 끝이다. 어차피 문은 잠겨있지 않다. 활짝 문을 열자 새하얀 벽지가 발린 거실이 가장 먼저 눈에 보인다. 소파인지 쿠션인지모를 검은 덩어리와 어질러져있는 얇은 이불. 그것을 제외하면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하기 그지없다. 토모야는 슬리퍼와 운동화 두켤레가 전부인 신발장에 제 신발을 고스란히 벗어 두고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를 내본다.

“나 왔대도요.”

“오, 토모야군. 오늘은 일찍오셨네요?”

집의 주인은 부엌에서 무언갈 만들고 있던 모양인지 앞치마를 한 채로 토모야를 반겼다.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입니다. 이제는 거의 인사나 다름 업는 자기소개에도 네에. 저는 저의 마시로 토모야입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걸 보고 숙련도가 쌓였다고 하지. 와타루는 토모야의 고요를 견딜 수 없다는 듯 그의 팔목을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난잡할 줄 알았던 부엌은 의외로 몇가지 조리기구가 밖에 나와있는 것을 제외하면 깔끔했다. 만든 요리는 아마도... 샌드위치. 예쁘게 이쑤시개가 꽂혀있는 샌드위치를 보자 토모야의 눈이 크게 뜨인다.

“당신이 만들었어요?”
 “그럼요, 요리는 특기랍니다. 당신같이 평범한 사람은 비디오 하나를 빌려오는데도 두 시간씩이나 걸리지만요? 저는 이렇게 춤을 추며 집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는 것도 가능하거든요...♪”

토모야는 무어라 더 대꾸를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대신 손에 든 까만 봉투를 흔들었다. 오늘 빌려온 영화는 이터널 선샤인이에요.

“평범한 멜로물이네요.”
 “엄청 유명하다는데 부장은 봤나요?”

“음...봤습니다.”

와타루는 잠시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들고 서있다가 이내 빙긋 웃으며 말한다.

“재밌었어요.”

영화부도 아닌 것이 어째서 주말이면 토모야가 이렇게 꼬박꼬박 와타루의 집을 찾게 되었냐 함은. 가장 큰 첫 번째 원인은 바로 토모야의 오지랖에 있었다. 이상하고 맛이간 것 같지만 그래도 분명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런 사람이 가끔가다 외로움에 사무치고 있는, 무려 현재진행중인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때. 그걸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원인은 와타루의 애매한 태도에 있었다. 와타루는 주말마다 영화를 봐요, 도 아니고 이번주 주말에도 올건가요? 도 아니지만. 토모야가 찾아올 때마다 마치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음식을 준비해놓고 두 개의 방석 이불을 깔아놓는 식이었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임에도 별로, 고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물론 토모야가 질려서 찾아오지 않게 되면 이인분의 음식을 홀로 먹어야 하는 슬픔은 있겠지만.....

이제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과거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은 마지막 대화를 앞두고 있다. 그들의 추억이 사라지는 것을 두눈 뜨고 봐야만 하는 것이다. 여자주인공이 말한다. 이런 추억이 이제 다 사라지게 돼. 어떻게 하지? 와타루는 자그만 토모야의 몸을 쿠션처럼 끌어안고 홀로 대사를 곱씹어본다. 사라지는 추억에 대하여. 히비키 와타루가 책장을 넘기듯 그렇게 보내왔던 지난 날들을 곱씹어본다. 남자주인공은 대답했다. 그냥 음미하자. 그 순간 어째서 토모야와 눈이 맞았는지.

와타루는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고개를 숙인다. 허리를 굽힐수록 쌕쌕 작은 숨소리가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는 그즈음에서 멈추고 팡, 미소를 터트린다.

“영화가 지루했나요 토모야군? 지금 거의 잠드실 뻔 한거 맞지요? 이런 명작을 보면서도 느끼는 게 없다니. 토모야군 다우면서도, 뭐. 다음에는 제가 더 흥미진진한걸 찾아보도록 하죠..♪”

잠깐 뿔이 난 듯 뾰로통 뺨을 부풀리고 있던 토모야가 말했다. 

“다음이라고 했어요. 분명.”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내린다. 영화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있었다. 와타루는 이 다음 대사가 뭐였더라. 고민하다가 그냥 기억을 잃은 남자가 되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그의 가슴 한켠에도 재미있는 무언가가 피어난듯 했다. 열 아홉 살 만에 처음으로.  


Posted by Piece of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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